도서관 로망

공공 사회의 가장 큰 위험과 매력은 내가 지금 손대고 있는 이 물건을 사실은 여러 사람이 스쳐 간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요새처럼 공중위생과 개인보안에 대한 경계심이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두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길을 앞서, 혹은 뒤서서 걸어가는 사람이 있음은 왠지 외롭지 않다는 환상을 주지 않는가?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간 물건들 - 낡은 드레스, 레드 바이올린, 유대교의 경전, 무엇이 되었든지 - 에 대한 거대하고도 작은 서사들은 섬찟하면서도 매혹적인 도시전설들을 이룬다. 다 다르면서도 한 접점을 공유하고 있는 그들의 운명.

그 중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량한 호의와 이해를 보이는 습성이 있는 만큼,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사실에 낭만을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책이다. 음악도 그러한 대상이 될 수는 있었겠으나, 책만큼 대여와 공유, 전달이 쉽지 않은 매체이므로 그 낭만을 고스란히 책과 도서관에 양보했다. 그래서 유난히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빌린 사람에 대한 환상적 이야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빌렸던 책마다 그어진 밑줄, 대출 카드에서 발견한 낯익은 이름, 수신자에게 보내지 못하고 끼어 있던 편지. 포도주와 모래의 흔적.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풀씨처럼 간직되어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그 페이지에 다시 도달했을 때 피어난다.

그래서 디지털화 된 도서관이 도래했을 당시, 이제 그 책을 거쳐갔던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역추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책의 페이지를 펼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정보가 차단되었다는 걸 아쉬워한 사람들도 있으리라.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를 파고들어 이어질 수 있는 타인의 빈틈을 그리워하는 게 사람이다. 또, 이전에는 책을 펼친 순간, 누구나 아키비스트나 문서복원가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이름이 비트와 바이트로 컴퓨터에 똑똑히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이전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다. 너무 분명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정보에는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

구립 정보화 도서관에서 빌려 온 "겐지와 겐이치로" B 권에서 누군가의 도서 반납 영수증을 발견했다. 2007년 여름에 김언수의 캐비닛을 읽고 반납한 영수증이었다.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는 취향이다. 영수증에 찍힌 이름으로 나는 그/그녀를 상상한다. 디지털 도서관의 대출카드. 그 뒤에 소녀의 초상이라도 그려져 있다면 영화적 환상의 재료가 다 마련된 셈이지만, 현실의 흔적들은 하얀 종이 위에 프린트 된 선명한 글자뿐이다. 그래도 내가 읽는 책을 지나간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통행증 같은 종이다.

익명의 타인에게 연대감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도서관 로망이란 이런 게 아닐까. 책을 매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진다. 어떤 책의 제목처럼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 이 탄생한다. 점점이 흩어져 있던 타인들에게 한 줄 선을 긋는 것, 이 로망을 위해 읽던 책에 나 또한 반납영수증을 한 번 끼워 넣어볼까, 한 순간 생각한다. 그러면 언젠가 또 다른 책의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발견하고 도서관 별자리처럼 마음 속에서 선을 그어나갈지도 모르니.

by MissPolly | 2008/05/12 00:29 | 일상의 노랫말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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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edou at 2008/05/12 15:18
간밤에 애니 <귀를 기울이면>을 다시 봤어요. 10여 년만에 다시 봤나봐요. 여중생 시츠쿠와 그 친구들이 이마를 맞대고 일본어로 개사해서 부르던 'Take me home country roads'도 참 촌스럽고 이쁘고, 시츠쿠가 학교 도서관의 대출 카드에서 자꾸만 발견하는 '세이지'라는 이름도 여전히 정겹고. 언덕 위 아빠가 근무하는 도서관과, 세이지 할아버지의 골동품 가게... 고양이 남작의 이야기도요.

그래서 다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로 이어지는 도서관 대출카드의 로망에 대해 잠깐 떠올렸더랍니다. 오늘 여기 와서 이 글을 읽으니 기분이 더 좋아져요. 건강하세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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